[지오의 생각] 죽음은 '권리'가 아니라 결정의 순간 — 영국이 조력사망 법안을 부결한 이유
지난주 런던 하원은 네 시간의 토론 끝에 표결에 들어섰고, 556명의 의원이 각자의 양심을 꺼내 놓았다. 찬성 270, 반대 286. 말기 성인 환자의 조력 사망을 허용하는 법안은 16표 차로 무산됐다. 근소한 차이지만 이 숫자는 단순한 의원들의 취향이 아니라, 한 사회가 죽음 앞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 내린 답이기도 하다.
조력 사망은 이미 전 세계의 공기가 되었다. 네덜란드와 벨기에, 스위스, 캐나다는 오래전에 이 길을 열었다. 불과 두 달 전인 지난 7월, 프랑스는 하원을 통과한 법안을 헌법위원회의 합헌 결정까지 거쳐 마크롱 대통령이 직접 공포하며 세계 12번째 도입국이 됐다. 가톨릭의 오랜 전통을 안고 있던 나라조차 '의학적 도움을 받아 생을 마감할 권리'를 제도 안으로 끌어들였다. 이 흐름만 보면 영국의 선택은 시대착오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같은 주에 일어난 다른 표결을 함께 놓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스코틀랜드는 지난봄 비슷한 법안을 부결시켰고, 슬로베니아는 의회를 통과한 법안조차 국민투표에서 뒤집었다. 유럽은 조력 사망으로 일제히 달려가는 단일한 블록이 아니라, 이 문제만큼은 국가마다 저마다의 속도와 결론을 내리고 있는 파편적인 지도다. '죽을 권리'의 확산이라는 단순한 서사는, 이 지도를 다 설명하지 못한다.
영국의 표결이 특히 흥미로운 것은 방식에 있다. 이번 법안은 정부가 중립을 지켰고, 총리 앤디 번햄은 "토론에 과도하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지 않다"며 아예 기권을 선택했다. 의원들은 당론도 없이 각자의 이야기를 꺼내며 찬반을 갈랐다. 개인적인 경험담이 오갔다고 한다. 조력 사망 문제는 이토록 깊이 개인적인 영역이기에, 정당의 간판 아래로 밀어 넣는 것이 오히려 어색하다는 사실이 이 방식에서 드러난다.
여기서 나는 한 가지를 짚고 싶다. 이 논쟁의 표면적 대립은 대개 '환자의 자기결정권'과 '생명의 존엄성'이라는 두 축으로 압축된다. 진보 진영은 고통 앞에서의 자율을, 보수와 종교계는 취약한 삶이 시스템에 의해 선택당할 위험을 내세운다. 그러나 영국의 표결이 보여준 건 그 이분법 밖의 제3의 진실이다. 이 문제는 '권리'의 언어로는 완결되지 않는다는 것. 죽음의 순간을 국가가 허가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과 제도 사이에서 그 순간을 어떤 절차로 관리할 것이냐의 문제라는 점이다.
핵심은 이 법안이 요구한 '안전장치의 무게'였다. 예후가 6개월 미만인 말기 환자, 적어도 두 명의 의사와 전문가 패널의 승인, 2일의 숙려 기간, 당일 재확인. 이렇게 꼼꼼하게 조건을 쌓은 이유는 단순하다. 조력 사망을 허용하는 사회가 우연히라도 '강압'이라는 그림자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취약한 환자가 가족이나 사회의 기대를 읽고 스스로를 희생시키는 압력에 노출되는 순간, '권리'라는 이름이 그 압력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뒤집힐 수 있다. 프랑스가 참여·고용 보정을 붙이고 정신적 고통을 대상에서 제외한 것도, 영국의 의원들이 이 법안을 반대한 것도 결국 이 불안에서 출발한다.
프랑스와 영국, 두 나라의 결말이 갈린 지점은 '얼마나 허용하느냐'가 아니라 '그 허용이 누구의 몫으로 남느냐'였다. 프랑스는 제도가 신중한 절차로 시민의 죽음을 관리하길 선택했고, 영국은 아직 그 몫을 개인과 의료계에 온전히 위임하기가 두려웠다. 어느 쪽이 더 옳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이 대비는 하나를 알려준다. 조력 사망은 '통과냐 부결이냐'의 순간이 아니라, 그 다음에 매일 반복될 절차의 디테일에서 그 사회의 성격이 결정되는 문제라는 것.
하원에서 막을 내린 법안은 회기 내 다시 꺼내지 못한다. 하지만 영국의 두 차례 하원 지지와 상원의 방해로 무산된 2년을 생각하면, 이 문은 닫힌 게 아니라 잠시 덮여 있는 것이다. 죽음은 어느 사회에도, 어느 세대에도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질문이지만, 그것을 '한 표'의 결과로 끝내기만 한다면 그 사회는 다음 세대에 더 무거운 질문을 물려줄 뿐이다. 오늘 부결된 것은 하나의 법안이지, 그 질문 자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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