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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오의 생각] 바다를 잃은 나라 — 노벨평화상과 항구 사이에서

월요일, 아프리카 동쪽 에티오피아의 수도 아디스아바바. 의회 안에서 아비 아메드 총리가 다시 5년 임기를 시작하는 선서를 했다. 그 자리에서 그는 뜻밖의 말을 꺼냈다. "우리는 바다로 나갈 길을 반드시 확보하겠다." 에티오피아는 바다가 없는 나라다. 강과 산으로 둘러싸인 땅 한가운데 있다. 인구는 아비 총리 말로 1억 5천만 명이다. 그 많은 사람이 살아가려면 물건을 사고팔아야 하는데, 배를 띄울 항구가 하나도 없다. 1993년 에리트레아가 독립하면서 해안선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 전까지 쓰던 아삽 항구도 1998년부터 2년간 벌어진 전쟁을 끝으로 닫혔다. 지금은 옆 나라 지부티의 항구를 빌려 쓴다. 커피를 팔든 기름을 사오든, 늘 남의 나라 문을 지나야 한다. 자기 집에 현관이 없어서 이웃집 대문을 빌려 드나드는 셈이다. 여기서 이상한 점이 하나 있다. 아비 총리는 2019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사람이다. 바로 에리트레아와의 국경 분쟁을 끝냈다는 공로로. 심사위원들은 국경 다툼을 멈추고 평화를 이끌어냈다며 상을 줬다. 그런데 그 상을 받은 지 7년 만에 두 나라는 등을 돌렸다. 지난 10월 1일, 에티오피아는 에리트레아 수도 아스마라에 있던 자기 대사관을 닫고, 자기 땅에 있던 에리트레아 외교관 10명에게 48시간 안에 나가라고 했다. 에리트레아는 곧바로 "모든 외교 관계를 끊겠다"고 맞받았다. 평화의 상징이 두 나라를 갈라놓은 셈이다. 동시에 북쪽에서는 전쟁이 다시 붙었다. 9월 20일, 에티오피아 곳곳의 무장 단체 일곱 곳이 뭉쳤다. 티그라이 지역의 옛 집권 세력인 티그라이 해방인민전선(TPLF)도 여기 끼었다. 이들은 아비 정부를 끌어내리겠다고 선언했다. 사흘 뒤인 9월 23일부터 정부군과 이들의 교전이 시작됐다. 10월 3일, 정부군은 티그라이의 중심 도시 메켈레를 되찾았다. 티그라이 쪽은 큰 싸움 없이 물러났다며 다른 곳에서 계속 싸우겠다고 밝혔다. 싸움은 옆 지역인 아파르와 암하라로 번졌다. 2020년부터 2...

[지오의 생각] 다리를 끊으면 사람이 무너진다

한 나라의 총리가 밤기차를 타고 조용히 국경을 넘었다. 2026년 10월 4일 일요일,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다. '총리'는 나라를 이끄는 가장 높은 자리의 정치인이다. 그는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 도착하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우크라이나는 앞으로 몇 주 동안 우리의 전폭적인 지지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왔습니다." 그런데 그가 도착한 바로 그날 아침, 키이우에서는 폭발음이 울렸다. 하필 그날이었다. 러시아 드론이 드니프로 강 위의 '피브니치니(북부) 다리'로 돌진해 터졌다. 차들이 다리를 건너는 중이었다. 불덩이가 치솟고 검은 연기가 올라갔다. 두 명이 다쳤다. 이 다리가 맞은 것은 이틀 연속이었다. 며칠 전에는 남쪽의 '피브덴니(남부) 다리'가 여러 차례 맞았다. 전쟁이 시작된 뒤 키이우의 다리가 공격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여기서 잠깐 멈춰 보자. 러시아는 왜 하필 이날, 하필 '다리'를 때렸을까. 키이우는 강으로 갈라진 도시다. 드니프로 강을 사이에 두고 서쪽과 동쪽으로 나뉜다. 다리가 여덟 개, 그중 차가 다니는 다리가 여섯 개다. 서쪽에는 정부 청사와 회사들이 모여 있고, 동쪽에는 약 100만 명이 사는 동네가 있다. 쉽게 말해, 시민 대부분이 동쪽에서 자고 서쪽으로 출근한다. 그 통로가 바로 다리다. 러시아는 "병력과 군수품을 옮기는 데 쓰이는 다리를 때렸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실제로 벌어진 일은 달랐다. 차가 다니는 다리 여섯 개 가운데 다섯 개의 통행이 막히거나 크게 제한됐다. 출근길이 무너지고, 물건을 나르는 길이 끊겼다. 다리가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은 더 이상 예전처럼 살 수 없게 됐다. 총을 쏘지 않고도 도시의 하루를 멈춰 세운 것이다. 이건 우연이 아니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우크라이나가 입수했다는 러시아의 겨울 공격 계획 문건을 보도했다. 내용은 이렇다. 변전소(전기를 나눠 보내는 시설)와 발전소, 보...

[지오의 생각] "완전한 승리"라는 말이 감춘 것

한 예비역 장군이 자기 나라 정부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2026년 10월, 미국 워싱턴의 한 연구소가 연 화상회의에서였다. 이름은 니찬 알론. 그는 가자 전쟁이 시작될 무렵 이스라엘 군에서 인질 협상을 맡았던 사람이다. 쉽게 말해, 붙잡힌 사람을 데려오기 위해 적과 협상하는 창구였다. 그가 한 말은 짧고 무거웠다. "전쟁은 1년은 더 일찍 끝낼 수 있었다." 인질 전원을 데려오는 합의도 2025년 10월보다 훨씬 먼저 이뤄질 수 있었다고 했다. 다른 전략 목표를 크게 해치지 않고도 말이다. 그는 이스라엘 총리가 내걸었던 "완전한 승리"라는 구호를 두고 "거짓"이라고까지 말했다. 그가 짚은 숫자가 하나 있다. 살아서 붙잡혀 간 뒤 붙잡힌 채 숨진 사람이 약 40명. 다른 결정, 다른 협상이었다면 일부는 살아서 돌아올 수 있었다고 그는 말한다. 여기서 한 가지 짚어야 할 게 있다. "인질 전원을 데려왔다"는 말은 사실처럼 들리지만, 산 사람만 데려왔다는 뜻이 아니다. 숨진 채 돌아온 사람도 그 '전원' 안에 들어간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숫자로 만든 문장은 사람을 속일 수 있다. 그래서 여당은 바로 반격했다. 알론이 "하마스에 항복하라고 부추겼다"는 것이다. 그랬다면 라파 진격이나 주요 인물 제거 같은 성과를 못 냈을 거라고 주장했다. 극우 성향의 재무장관 스모트리치는 앞서 "나 덕분에 인질들이 돌아왔다"고 했다. 알론은 그에게 "합의를 막아온 사람이 공을 가질 수는 없다"고 맞섰다. 반대편 이야기도 있다. 예루살렘포스트는 다른 협상 관계자들이 알론의 주장에 반대한다고 전했다. 하마스도 유리한 조건을 노리다 여러 번 기회를 놓쳤다는 것이다. 전쟁이 길어진 책임이 한쪽에만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런데 여기서 놓치기 쉬운 지점이 있다. 전쟁을 계속하는 게 누구에게 이익이었느냐는 질문이다. ...

[지오의 생각] 100만 달러가 노린 것은 선거가 아니라 법원이었다

선거를 이틀 앞둔 브라질에서 검찰총장이 형사 고발장을 냈다. 이 사건을 촉발한 건 100만 달러, 우리 돈으로 약 14억 원이었다. 미국 연방 정부 예산 전체와 견주면 티끌 같은 액수다. 그런데 그 돈이 어디로 가려 했는지가 문제였다. 미국 국무부에는 '인권민주주의기금(HRDF)'이 있다. 미국 의회가 "권위주의 나라에서 인권을 지키는 사람들을 돕는 데 쓰라"며 정해준 돈이다. 올해는 약 2억 500만 달러가 배정됐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 돈 가운데 1억 7500만 달러가 넘는 금액을 전혀 다른 곳으로 돌리려 했다. 그 목록에는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단체를 돕는 4000만 달러, 남아프리카 백인(아프리칸너)의 권리를 주장하는 단체 지원, 그리고 '브라질의 사법 무력화와 검열에 맞선다'는 이름의 100만 달러가 들어 있었다. 이 돈은 정부의 회계연도가 끝나기 몇 시간 전에 급하게 확정됐다. 감시할 시간을 주지 않은 셈이다. 왜 하필 브라질 대법원이었을까. 지난해 자이르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은 2022년 대선에서 진 뒤 결과를 뒤집으려 했다는 혐의로 27년형을 선고받았다. 이 재판을 이끈 사람이 알레샨드리 지 모라이스 대법관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 재판을 '마녀사냥'이라 불렀고, 브라질에 다른 나라보다 훨씬 무거운 관세를 매겼다. 여기서 많은 사람이 놓치는 지점이 있다. 미국이 노린 것은 이번 선거 자체가 아니다. 법원이다. 선거는 이겨도 다음에 질 수 있다. 하지만 법원은 한 번 '정치 도구'라는 낙인이 찍히면 회복에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린다. 100만 달러는 선거 광고에 쓰이는 돈이 아니다. '로페이'를 겨냥한 돈이다. 로페이는 법(law)과 전쟁(warfare)을 합친 말로, 법을 무기처럼 써서 정적을 누른다는 뜻이다. 요컨대 "이 법원은 정치 재판을 한다"는 인식을 퍼뜨리는 데 쓰이는 돈이다. 그 인식이 자리를 잡으면 어떻게 될까...

[지오의 생각] 문 39개가 열린 날, 450개의 문은 왜 그대로였나

지난주 금요일 밤부터 토요일 새벽 사이, 남미 베네수엘라의 감옥 몇 곳에서 문이 열렸습니다. 나온 사람은 39명. 정치범입니다. 정치범은 정부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잡혀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중에는 2018년에 옛 대통령을 죽이려 했다는 혐의로 5년형을 받은 대학생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형기는 2023년에 이미 끝나 있었습니다. 감옥에 있을 이유가 3년 넘게 없었던 셈입니다. 9년을 갇혀 있다 나온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왜 하필 이번 주에 문이 열렸을까요. 달력을 보면 답이 보입니다. 로드리게스 임시 대통령은 지난주 화요일, 미국 뉴욕에서 열린 유엔 총회에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만났습니다. 사흘 뒤 감옥 문이 열렸습니다. 금요일에는 정부와 야권이 두 번째 협상 테이블에 앉았습니다. 야권은 정부와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협상은 미국이 뒤에서 주선합니다. 여기에 숫자를 하나 더 붙여야 합니다. 39명이 나온 그 무렵, 감옥에 남아 있는 사람은 344명이었습니다. 인권단체 '포로 페날'이 지난 9월 18일 기준으로 센 숫자입니다. 다른 단체 '헤페'는 같은 무렵 450명이라고 말합니다. 어느 쪽이 맞는지 정부는 밝히지 않습니다. 정부는 오랫동안 "정치범은 없다"고 주장해 왔고, 이번 석방도 선의와 화해의 표시라고 설명합니다. 즉 문이 활짝 열린 게 아니라 문틈으로 몇 명이 나온 겁니다. 더 눈에 띄는 건 리듬입니다. 지난 1월, 미국이 마두로 전 대통령을 군사 작전으로 붙잡아 갔습니다. 그 직후 수백 명이 풀려났습니다. 4월, 로드리게스가 사면 제도를 "끝났다"고 선언하자 석방은 뚝 끊겼습니다. 사면은 죄를 없던 걸로 해 주는 제도입니다. 인권단체들은 그 법에 만료 기한이 없는데 대통령이 혼자 끝낼 수는 없다며 반발했습니다. 그리고 이번 주, 미국 대통령과 만난 직후 다시 문이 열렸습니다. 같은 이유로 열리고 같은 이유로 닫힌다면, 그건 법이 아니라 거...

[지오의 생각] 50% 관세 뒤에 숨은 숫자 — 브라질이 정말 파는 것

지난 목요일 밤, 브라질 텔레비전에 1분짜리 광고가 나갔습니다. 여성 목소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플라비우 보우소나루는 트럼프의 후보입니다. 트럼프가 원하는 것은 브라질을 식민지로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의 재물을 가져가고, 우리의 미래를 훔치고, 우리를 먼지 속에 버려두는 것입니다.” 식민지(다른 나라가 와서 자기 땅처럼 다스리는 것)라는 말은 브라질에서 가벼운 단어가 아닙니다. 브라질은 1500년부터 1822년까지 포르투갈의 식민지였습니다. 그래서 이 광고는 국민이 기억하는 오래된 상처를 정확히 겨눕니다. 룰라 대통령은 같은 날 자기 SNS에 이렇게 썼습니다. “보우소나루에게 맡기면 브라질은 다시 식민지가 된다.” 미국 국무부는 곧바로 부인했습니다. “민주 국가의 선거를 흔들려는 계략이라는 주장은 근거 없는 거짓말”이라고요. 선거는 다음 달 4일입니다. 여론조사에서 두 후보는 47.7퍼센트 대 47.4퍼센트로 붙어 있습니다. 조사마다 순위가 뒤바뀌고, 오차범위(조사 결과가 실제와 2퍼센트포인트쯤 다를 수 있다는 뜻) 안에 있어 누가 앞선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아무도 과반을 얻지 못하면 10월 25일 결선에서 다시 붙습니다. 여기서부터가 중요합니다. 이 싸움은 광고 속 말싸움이지만, 광고 뒤에 깔린 사실들은 말싸움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먼저 관세입니다. 관세는 다른 나라 물건이 들어올 때 붙이는 세금입니다. 지난해 7월 트럼프 대통령은 브라질 제품에 50퍼센트 관세를 붙이겠다고 하면서, 그 이유로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의 재판을 직접 들었습니다. “이 재판은 열려서는 안 된다”고 적었습니다. 재판을 멈추게 하려고 세금을 무기로 쓴 셈입니다. 올해 7월에는 미국 무역법 301조(불공정 무역 관행에 벌을 주는 규정)로 25퍼센트 관세가 붙었습니다. 명분은 디지털 거래와 지식재산권이었습니다. 그런데 숫자를 보면 이상합니다. 미국은 브라질과의 무역에서 오히려 돈을 버는 나라입니다. 지난해 미국이 브라질에 판 물건은 544억 달러, 브라질이 ...

[지오의 생각] 브라질은 누구의 뒷마당도 아니다 — 유엔 연설 열두 날 전의 질문

2026년 9월 22일, 미국 뉴욕의 유엔(UN, 나라들이 모여 세계 문제를 의논하는 곳) 총회장. 이 자리에는 오래된 전통이 하나 있다. 1955년부터 이 첫 연설은 브라질이 맡았다. 이날도 여든 살의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브라질 대통령이 먼저 단상에 올랐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서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었다. 두 사람은 지난해 같은 자리에서 악수하며 "좋은 케미"라고 말했던 사이다. 룰라가 한 말은 짧고 분명했다. "브라질의 민주주의는 브라질 국민의 것이다. 브라질은 주권 국가로 남을 것이다." 주권은 나라가 자기 일을 스스로 정할 권리라는 뜻이다. 이어서 나온 말이 더 셌다. "브라질은 누구의 뒷마당도 아니다." 그는 미국이라는 이름을 대지 않았다. 그래도 듣는 사람은 다 알았다. 이 연설이 나온 시점을 먼저 봐야 한다. 브라질 대선이 열두 날 뒤였다. 1차 투표는 10월 4일, 결선 투표는 10월 25일이다. 유권자는 1억 5,900만 명. 룰라는 네 번째 임기에 도전한다. 여든 살에 치르는 일곱 번째 대통령 선거다. 대통령이 왜 유엔 무대에서 자기 나라 선거 이야기를 했을까. 배경을 풀어야 한다. 올해 7월, 미국은 브라질 물건에 관세를 매겼다. 관세는 다른 나라 물건이 들어올 때 붙는 세금이다. 문을 좁히는 것과 같다. 기본이 25퍼센트, 여기에 다른 명목으로 12.5퍼센트가 더 붙어 최고 37.5퍼센트가 됐다. 다만 커피와 소고기, 비행기 부품, 원자재는 빠졌다. 브라질 정부 계산으로는 대미 수출의 23퍼센트 정도가 영향을 받는다. 그런데 숫자를 뜯어보면 이야기가 이상해진다. 미국은 브라질에 물건을 더 많이 팔아 왔다. 무역 흑자, 그러니까 미국이 더 많이 번 상태가 2008년부터 계속됐다. 지난해 흑자만 140억 달러였다. 브라질로 들어가는 미국 물건의 76퍼센트는 세금이 아예 0퍼센트였고, 평균 관세율도 3.1퍼센트에 불과했다. 돈을 더 버는 쪽이 ...

[지오의 생각]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다섯 나라가 고른다

한국 시간 토요일, 칠레의 첫 여성 대통령을 지낸 미첼 바첼레트가 짧은 영상 하나를 올렸다. 인스타그램에 올린 1분 남짓한 영상이었다. "나는 유엔 사무총장 후보를 그만두기로 했다." 유엔(세계 나라들이 모여 함께 의논하는 국제 기구)의 사무총장은 이 기구의 얼굴이다. 지금은 안토니우 구테흐스가 맡고 있고, 임기는 올해 12월 31일에 끝난다. 그래서 전 세계가 80년 만에 처음 나올 여성 사무총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첼레트는 그 후보 중 하나였다. 대통령을 두 번 했고, 유엔에서 인권 책임자도 지냈다. 그런 사람이 왜 스스로 물러났을까. 답은 이틀 전에 나왔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세계 평화와 안전을 다루는 핵심 회의체)가 비공개로 세 번째 '가투표'를 했다. 가투표는 정식 선거가 아니라, 누가 얼마나 지지를 받는지 미리 확인하는 절차다. 여기서 바첼레트가 받은 표는 찬성 1표, 반대 11표였다. 7월에는 찬성이 6표였는데 8월에 2표로 줄었고, 이번에는 1표까지 내려앉았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점이 하나 있다. 유엔 회원국은 193개다. 그런데 새 사무총장을 실제로 정하는 곳은 15개 나라가 모인 안보리이고, 그중에서도 거부권(다른 나라가 모두 찬성해도 한 나라가 혼자 막을 수 있는 권한)을 가진 5개 나라가 사실상 결정한다.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중국이다. 총회는 안보리가 추천한 한 사람을 그대로 인정해 왔다. 한 번도 뒤집은 적이 없다. 즉 193개 나라가 뽑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5개 나라가 뽑는다. 바첼레트가 받은 1표는 그 구조를 그대로 보여준다. 그리고 바첼레트를 떨어뜨린 건 그의 실력이 아니었다. 자기 나라와 미국이었다. 칠레는 지난 2월 바첼레트를 후보로 직접 추천했다. 브라질과 멕시코도 힘을 보탰다. 그런데 지난 3월, 칠레에 새 대통령이 들어섰다. '남미의 트럼프'로 불리는 극우 성향의 호세 안토니오 카스트다. 그는 취임한 지 얼마 안 돼 자기 나라가 추천한 ...

[지오의 생각] 러시아를 벌하는 법이 미국 지갑을 건드리는 이유

지난 금요일, 미국 워싱턴 백악관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한 법안에 서명했다. 이름이 길다. ‘2026년 린지 O. 그레이엄 대러시아·대이란 제재법’이다. 이름 속의 그레이엄은 지난 7월 갑자기 세상을 떠난 공화당 상원의원 린지 그레이엄이다. 이 법은 미국 의회에서 여당과 야당이 거의 함께 손을 들어 통과됐다. 상원에서는 86대 11, 하원에서는 262대 159였다. 우크라이나와 관련된 큰 법안이 미국 의회를 통과한 것이 2년 넘게 없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꽤 이례적인 일이다. 보통은 여당과 야당이 이렇게 같이 움직이지 않는다. 법이 하려는 일은 이렇다. 러시아 대통령과 고위 인사, 러시아 은행, 러시아의 에너지와 무기 산업을 제재한다. 제재는 거래를 막는 벌이다.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들어오는 물건에는 최대 500%의 세금을 붙일 수 있게 했다. 그런데 진짜 핵심은 다른 곳에 있다. 러시아의 원유(땅에서 뽑아 올리는 기름)와 천연가스를 가장 많이 사들이는 다섯 나라에 최대 100%의 관세를 매길 수 있게 했다. 관세는 다른 나라에서 들어오는 물건에 붙는 세금이다. 세금이 100% 붙으면 물건 값이 두 배가 된다. 그러면 아무도 그 물건을 사지 않는다. 그 다섯 나라 안에 중국과 인도가 들어갈 것이 거의 확실하다. 러시아 기름을 가장 많이 사는 나라가 이 둘이기 때문이다. 법은 러시아를 직접 때리는 대신, 러시아 기름을 사주는 나라들을 때리겠다고 선언한 셈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미국이 러시아를 조인다”는 이야기로 끝난다. 그런데 법문을 천천히 읽으면 이상한 구석이 하나 보인다. 법은 대통령이 관세를 ‘매길 수 있다’고 하고, ‘국익에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면제할 수 있다’고 한다. ‘매길 수 있다’는 말은 ‘매겨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총은 장전됐지만, 방아쇠는 대통령 손에 있다. 미국 하원 외교위...

[지오의 생각] 정확히 겨냥된 교실 — 누가 이 문장을 끝까지 쓸까

2026년 2월 28일 오전, 이란 남부의 작은 항구 도시 미나브. 샤자레 타이예베 초등학교에서는 그날도 수업이 한창이었다. 위층은 남학생, 아래층은 여학생이 배웠다. 시계는 오전 10시를 조금 넘긴 무렵이었다. 그때 하늘에서 미사일이 내려왔다. 지붕이 무너지고 교실이 무너졌다. 이란 정부가 세어 낸 사망자는 156명. 그중 약 120명이 일곱 살에서 열두 살 사이의 아이들이었다. 이 공격은 전쟁 첫날에 일어났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을 공격하며 시작한 전쟁의 첫 장면이, 아이들이 앉아 있는 교실이었던 셈이다. 그로부터 여섯 달이 지난 9월 17일, 유엔(여러 나라가 함께 만든 국제기구)의 조사단이 보고서를 내놨다. 결론은 이랬다. "미군이 전쟁범죄를 저질렀다고 믿을 만한 합리적인 근거가 있다." 전쟁범죄(전쟁 중에 반드시 지켜야 하는 국제 규칙을 어기고 민간인을 죽이거나 다치게 하는 행위)라는 말은 무겁다. 이번 전쟁에서 유엔 기구가 미국의 행동을 이렇게 규정한 것은 처음이다. 같은 날 또 하나의 공격이 지목됐다. 남부 도시 라메르드에서 미사일이 텅스텐(아주 단단한 금속) 알갱이 수백 개를 흩뿌렸고, 그 알갱이들이 체육관과 옆 주거지에 쏟아졌다. 유엔 조사단은 이곳에서 민간인 남녀 22명이 숨졌다고 밝혔다. 배구 연습을 하던 청소년들이 휘말렸다는 보도도 있었다. 조사단은 두 장소 모두 "누가 봐도 민간 시설"이었다고 적었다. 그리고 한 가지를 더 짚었다. 미군이 "그 건물이 민간 시설일 위험을 알면서도 겨냥했고,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에 대해 무모하게 행동했다"는 것이다. 이 문장이 보고서에서 가장 무서운 대목이다. 폭탄이 엉뚱한 곳에 떨어져서 아이들이 죽은 게 아니다. 정확히 겨냥한 바로 그 자리에 아이들이 있었다는 뜻이다. 세계에서 가장 정밀하다는 미사일이, 교실을 골랐다. 그렇다면 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미국 쪽에서는 "표적 정보가 낡았다"는 설명...

[지오의 생각] '자발적 이주'라는 이름의 강제 추방 — 가자지구를 둘러싼 언어의 전쟁

이스라엘 국방장관 이스라엘 카츠는 지난주 한 콘퍼런스에서 이렇게 말했다. 가자지구에서 팔레스타인인을 제거하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며, 이스라엘은 "해상으로, 항공으로, 가능한 모든 수단으로" 그 일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그리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 구상을 지지하는 것을 "취소한 것이 아니라 단지 보류했을 뿐"이라고 덧붙였다. 같은 주, 국가안보장관 이타마르 벤그비르는 "이탈 710"이라는 이름의 7개년 계획을 내놓았다. 1년 안에 25만 명, 3년 안에 110만 명, 7년 안에 약 190만 명의 가자 주민을 내보내겠다는 숫자와 일정이 담긴 소책자였다. 그는 이주가 "자발적"이라고 강조했고, 재선에 성공하면 팔레스타인인을 추방할 전담 부처를 신설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두 발언이 나온 배경에는 총선이 있다. 다음 달 이스라엘 총선을 앞두고 극우 연정은 팔레스타인 혐오 선동의 강도를 높이고 있다. 벤그비르는 지난달에도 이스라엘군이 가자지구에서 "매일 30~40명을 제거해야 한다"고 말해 국제사회의 뭇매를 맞은 인물이다. 재무장관 베잘렐 스모트리히는 서안지구를 넘어 자국 영토 안에 유대인 정착촌을 확장하자는 구상까지 꺼냈다. 여론조사에서 네타냐후 연합이 야당과 동석을 다투는 상황, 극우 표심을 겨냥한 공약 경쟁이 이주 계획이라는 형태로 표면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 사건에서 가장 눈여겨볼 것은 숫자나 일정이 아니라, 그 계획을 감싸고 있는 언어다. "자발적 이주"라는 표현은 강제 추방을 정당화하는 가장 교묘한 장치다. 국제법상 강제 이주는 명백한 위반이지만, "자발적"이라는 수식어가 붙으면 그 행위의 성격이 흐려진다. 문제는 이 "자발성"이 어떤 조건에서 성립하느냐다. 가자지구에서 폭격과 철거와 살인이 계속되는 한,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떠나겠다고 선택하는 것은 자...

[지오의 생각] 유조선이 전쟁의 화폐가 되는 순간

호르무즈 해협, 그 좁은 물길 위에서 지난 주말 유조선들이 서로를 겨냥했다. 미군은 이란 연계 유조선 세 척을 무력화하거나 파괴했다고 밝혔고, 이란은 미국 관련 선박 세 척과 유조선 세 척을 공격했다고 맞섰다. 하르그섬 인근에서 불이 붙은 유조선의 냉각 시스템이 한 시간 만에 화재를 진압했다는 이란 국영매체의 보도는, 이 전쟁이 얼마나 일상적인 폭력으로 자리 잡았는지를 보여주는 한 장면이다. 이 사건을 단순히 '미·이란 갈등의 격화'라고 읽는 것은 절반만 맞다. 더 정확한 프레임은 이것이다. 이 전쟁은 이제 군함과 미사일이 아니라, 석유를 실어 나르는 배 를 통해 싸우고 있다. 하르그섬은 이란 원유 수출의 약 90%가 통과하는 핵심 터미널이다. 미국이 그 섬 인근의 유조선을 '영구 무력화'했다는 것은, 단순한 군사적 보복이 아니라 이란의 생명줄인 원유 수출을 직접 겨냥한 경제 전쟁의 일부다. 이란 역시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미국 관련 선박을 공격함으로써, 세계 에너지 수송의 관문을 인질로 삼는 전략으로 맞서고 있다. 여기서 일반인이 놓치는 지점이 있다. 양측이 내세우는 '보복'이라는 단어는, 사실상 무한한 상호 확대의 기계를 가동하는 스위치다. 미군이 유조선을 치면 이란이 군함을 치고, 이란이 군함을 치면 미군이 다시 유조선을 친다. AP 통신은 양국이 폭력의 굴레에 갇혀 결국 전면전으로 치달을 수 있다고 분석가들의 경고를 전했다. 이 굴레의 핵심은, 어느 쪽도 '먼저 멈추면 약해 보인다'는 계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데 있다. 보복은 전략이 아니라, 서로의 체면을 지키기 위한 의식(儀式)이 되어가고 있다. 더 깊이 들여다보면, 이 전쟁의 진짜 화폐는 미사일이 아니라 유가다. 6개월간 이어진 이 갈등으로 유가가 급등했고, 이란 경제는 제재와 해상 봉쇄로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미국이 이란의 원유 수출을 조이면 조일수록, 이란은 호르무즈 해협을 통한 세계 에너지 공급을 위협함으로써 협상력을 ...

[지오의 생각] 전쟁이 '잘 진행 중'이라면, 왜 끝날 때는 말하지 못하는가

목요일 백악관 브리핑. JD 밴스 부통령은 마이크 앞에 섰다. 질문은 단순했다. 미국과 이스라엘, 이란 사이의 전쟁이 언제 끝나느냐는 것. 그는 답을 피했다. 대신 이렇게 말했다. 6주간의 주요 전투로 이란의 방산 생산 능력을 성공적으로 약화시켰고, 전쟁의 심각성은 과장됐다. 그리고 현재의 불안정과 에너지 가격 상승은 모두 호르무즈 해협의 상업 항행을 차단한 이란의 결정 때문이라고. 갈등의 해결 여부는 이란이 선박 공격을 중단하는 시점에 달려 있다고 강조했다. 이 대답에는 한 가지 미묘한 모순이 숨어 있다. 전쟁이 이렇게 잘 진행되고 있다면, 왜 종료 시점을 말하지 못하는가. 성공적인 전쟁은 끝나는 시점을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이겼다"고 선언할 수 있다. 그런데 밴스는 성과를 자랑하면서도 종결 시점은 회피했다. 이 두 가지는 함께 성립하기 어렵다. 전쟁이 잘 되고 있다는 주장과,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고백 사이의 간극이 바로 이 전쟁의 진짜 상태를 보여준다. 더 눈에 띄는 것은 책임의 배치다. 밴스의 프레임은 명확하다. 모든 불안정의 원인은 이란이다. 이란이 선박 공격을 중단하면 전쟁은 끝난다. 이는 전시 수사의 전형적인 패턴이다. 상대방이 먼저 멈추면 끝난다는 논리. 하지만 이 프레임은 미국의 행동을 지운다. 지난주 미국은 호르무즈 해협의 이란 로켓 발사대를 공격했고, 이란 남부 시리크의 결혼식장을 포함한 표적을 미사일로 타격했다. 이 과정에서 민간인 4명이 숨지고 50여 명이 다쳤다는 보도가 나왔다. 전쟁 감시 단체 에어워즈는 지난 2월 이란 라메르드 시에서 미군의 정밀타격미사일이 주거 지역과 스포츠 단지에 떨어져 어린이 7명을 포함해 최소 21명의 민간인 사상자를 냈다고 분석했다. 이 숫자들은 밴스의 "심각성은 과장됐다"는 평가와 어긋난다. 여기서 일반인이 놓치기 쉬운 지점이 있다. 밴스의 발언은 전쟁의 실체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설명하는 방식을 통제하려는 시도다. "이란이 멈추면 끝난...

[지오의 생각] '정밀'이라는 이름의 광역 살상 — 정밀타격미사일이 가리는 것

2월 28일, 이란 남부 라메르드 시의 하늘에서 무언가가 터졌다. 스포츠 단지와 두 곳의 주거 지역 상공이었다. 폭발은 그 지점에서 50미터 떨어진 민간인을 쓰러뜨렸고, 그보다 세 배 이상 먼 거리까지 건물과 거리와 차량을 파편으로 도배했다. 이란 당국에 따르면 최소 21명이 숨졌고, 그중 일곱 명은 어린이였다. 이 무기의 이름은 '정밀타격미사일(Precision Strike Missile)'. 제조사 록히드 마틴은 이를 '미래의 탄도미사일'이라 홍보한다. 치명적이고, 장거리이고, 정밀하다고. 미군은 이 무기를 무기고에 도입하는 데 수십억 달러를 투자했다. 그런데 전쟁 감시 단체 에어워즈(Airwars)가 위성 사진과 현장 영상을 분석해 내놓은 결론은 이 홍보 문구와 정면으로 부딪힌다. 이 미사일은 공중에서 폭발해 수만 개의 촘촘한 금속 펠릿을 사방으로 뿜어내도록 설계됐다. '정밀'이라는 단어가 가리키는 것은 목표물 하나가 아니라, 넓은 반경을 뒤덮는 살상의 원이다. 여기서 가장 아이러니한 지점이 드러난다. 미군은 이란에 이 미사일을 발사한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라메르드를 직접 공격했다는 점은 부인한다. 그런데 라메르드 인근에는 이슬람혁명수비대(IRGC) 시설이 있었고, 위성 사진상 그 시설에는 피해가 없었다. 민간인만 죽었다. 무기 전문가 여섯 명(전직 군 관계자 둘 포함)은 AP에 이 미사일이 라메르드를 타격했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들은 모두 인구 밀집 지역 인근에서 이 무기를 쏘는 것을 피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나는 이 사건이 단순한 '오폭' 논쟁이 아니라, 정밀무기 신화가 어떻게 민간인 피해를 정당화하는 도구가 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본다. 미군은 이번 공격을 '제한적이고 정밀한 행동'이라고 부른다. 이란은 '전략적 치명적 실수'라고 규탄한다. 그런데 양쪽 모두 이 무기의 본질적 위험, 즉 인구 밀집 지역에서 사용하기에는 살상 반경이 너무 넓다는 사실 자...

[지오의 생각] 수주 만의 폭격, 경제 압박의 모순 — 이란 라락섬 공습이 보여주는 것

지난주 금요일까지만 해도 워싱턴의 기조는 분명해 보였다. 스콧 베센트 재무장관이 이란을 금융적으로 고립시키겠다며 "경제적 추방 작전"을 선언하고, 트럼프 행정부는 무기 재고가 줄고 전쟁 여론이 나빠지는 상황에서 제재라는 지팡이로 이 사태의 출구를 찾으려는 듯했다. 그리고 일요일, 미군이 이란 남부의 라락섬을 공습했다. 지난 7월 말 이후 처음으로 이란 본토를 직접 타격한 일이다. "제재로 길을 연다"던 손이 그날은 드론을 놀렸다. 미 중앙사령부는 이번 공격이 호르무즈 해협을 향해 기뢰를 실은 로켓을 쏘려던 발사대 2곳을 겨냥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란 혁명수비대(IRGC)는 이번 공격으로 여러 병사가 숨지거나 다쳤다고 확인하면서, 이를 "전략적이고 치명적인 실수"라고 규정하고 보복을 다짐했다. 핵심 해상수로를 두고 미국이 통제권을 자처하고, 이란은 해협이 봉쇄 상태라고 주장하는 가운데 벌어진 또 한 번의 군사적 충돌이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진짜로 눈여겨볼 대목은 폭격 자체가 아니라, 폭격이 온 시점이다. 미국은 지난주부터 제재와 2차 제재, 즉 이란과 거래하는 어느 나라든 벌하겠다는 으름장으로 선회했다. 트럼프 행정부가 수개월의 폭격 뒤에 내놓은 출구 전략이 곧 "경제 압살로 정권 붕괴를 기대한다"는 것이었는데, 그런 금융 공세의 한가운데에서 또 무력을 꺼내 든 것이다. 나는 여기서 모순을 읽는다. 제재로 굴복시키겠다는 선언은 사실상 "더 이상 싸우기 힘들다"는 고백인 동시에, 공습은 "그래도 마지막 카드는 무력"이라는 신호다. 두 목소리가 한 대통령 입에서 나오는 셈이다. 이 모순은 수치로도 드러난다. 미국 고위 당국자들은 이란의 호르무즈 통제력이 사라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국제유가는 정작 2% 급등하며 브렌트유가 90달러 선을 회복했고, 미국 휘발유 평균 가격은 갤런당 4달러를 훌쩍 넘은 지 오래다. 2월 전쟁 발발 전 3달러 미...

[지오의 생각] 권력의 호위를 받은 손, 누군가의 기억을 깨부수다

점령지 서안지구 마다마 마을의 돌기념비를 향해 해머가 내리쳐졌다. 이스라엘 의회의 극우 의원 즈비 수콧은 이스라엘군의 호위를 받은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영상 속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런 것은 그냥 둘 수 없다. 테러를 미화하는 곳은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 그가 부순 것은 1968년 카라메 전투와 두 차례 인티파다에서 목숨을 잃은 팔레스타인인들을 기리기 위해 2008년에 세워진 추모비였다. 이 장면은 그 자체로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누군가의 추모비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테러 미화물'로 읽힌다는 사실 말이다. 마을회의 의장 라미 나사르는 이 기념비가 정치 성향을 가리지 않고 이스라엘과의 충돌에서 희생된 이들을 기리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같은 돌을 두고 한쪽은 기억의 표식이라고 부르고, 다른 쪽은 지워야 할 선전물이라고 부른다. 기억과 선동, 애도와 선전은 그 경계가 언제나 흐릿하다. 그러나 그 경계를 가르는 권력을 누가, 어떤 방식으로 쥐고 있느냐는 결코 흐릿하지 않다. 이번 사건의 반응은 이스라엘 안팎을 가로질러 나왔다.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실은 "특히 공인에 의한 사적 제재(사적 사법)는 이스라엘군이 테러와 폭력 선동에 맞서는 임무에 집중하는 것을 막는 비난받아 마땅한 행위"라는 성명을 냈다. 총선에서 맞붙는 경쟁자인 가디 아이젠코트는 더 강하게 비판하며, 네타냐후가 "즐비 수콧 같은 무정부주의자들이 제멋대로 하도록 방치했다"고 지적했다. 반면 수콧이 속한 종교시오니즘당의 수장인 베잘렐 스모트리흐 재무장관은 좌파 야당이 '테러 그 자체보다 수콧을 규탄하는 데 급급하다'고 반박했다. 같은 진영 안에서조차 서로 다른 프레임이 충돌하는 것이다. 흥미로운 지점은 이스라엘군의 입장이다. 군은 수콧 일행을 위한 기념비 순회를 승인하고 경호를 제공했다고 밝히면서도, 그들이 "기만적으로, 허가 없이 행동했다"고 주장했다. 결국 군인들이 수콧을...

[지오의 생각] 좁은 물길 위의 두 나라 — 호르무즈 해협, 누가 그 길을 지키는가

테헤란의 회담장에서 두 외무장관이 마주 앉았을 때, 그들이 다루는 것은 국경도, 영토도 아닌 한 줄기의 물길이었다. 이란의 아바스 아라그치와 오만의 바드르 알부사이드. 이란 전쟁이 시작된 지 거의 여섯 달, 세계 석유와 액화가스의 약 5분의 1이 지나가던 호르무즈 해협은 그동안 사실상 닫혀 있었다. 그리고 그 좁은 물길을 다시 여는 일이, 이제 두 나라의 손에 맡겨졌다. 이번 회담의 결과물은 '공동 임시 항행 통로'의 구축과 해협 내 기뢰 제거를 위한 공동 노력이었다. 이란 차관 카젬 가리바바디는 임시 항로에 대한 양측의 이해가 이뤄졌다고 밝혔다. 구체적으로는 페르시아만으로 들어오는 항로는 이란 영해를 통과하고, 나가는 항로는 이란과 오만의 영해를 나눠 지나는 방식이다. 이후 기술 협상을 거쳐 영구 항행 통로와 해협의 미래 관리 협약을 맺는다는 계획이다. 이 장면을 단순한 '재개방 합의'로 읽는 것은 절반만 맞다. 더 정확히는, 이란과 오만이 그 물길의 관리권을 두고 벌어지는 더 큰 줄다리기에서 한 발을 내디딘 것이다. 이란은 미국이 파기한 종전 양해각서(MOU)의 복원 없이는 해협을 열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하면서도, 정작 협상 상대는 미국이 아니라 '이웃 국가'와 풀겠다고 선을 그었다. 오만은 그 이웃으로서, 미국과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흐트러진 글로벌 무역을 되살리기 위해 자발적 분담금 기반의 지역 공동 메커니즘을 제안했다. 두 나라의 이해관계는 겹치면서도 어긋난다. 이 협상의 배경에는 더 큰 긴장이 깔려 있다. 미국은 이란 항구에 대한 해상 봉쇄를 재개한 상태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호르무즈 해협의 기뢰가 모두 제거됐다며 재설치 시 무관용을 선언했다. 심지어 해협을 '미국 영토'로 선포하겠다는 발언까지 나왔다. 한쪽은 세계 에너지의 생명줄을 지키겠다는 명분으로, 다른 쪽은 자국의 주권과 안보라는 명분으로, 같은 물길을 두고 서로 다른 언어로 말하고 있다. 나는 이 이란-오만의 양자...

[지오의 생각] 경쟁하는 국경이 사라진 '우리가'의 끝 — 카니가 고른 전쟁

아이스하키 스틱과 의료용 혀 누름개, 와인과 시멘트, 유제품과 옷. 스물 개국 사이를 오가던 일상적인 물건들이, 어느 토요일 새벽 4시 GMT를 기해 한꺼번에 다른 이름을 갖게 됐다. 미국이 캐나다산 약 200억 달러어치 상품에 50퍼센트 관세를 부과한 것이다. 캐나다 총리의 반응은 단순했다. "동일한 규모로 맞대응하겠다." 그리고 9월 8일부터, 철강과 유제품과 전자제품에 대한 보복이 시작된다. 이 소식을 전하는 헤드라인들이 한결같이 카니를 '전쟁 선언'을 한 지도자로 그린다. 캐나다 언론은 그의 발언을 인용하며 "전쟁 상태라는 의미"라고 해석했다. 하지만 이 장면을 한 줄로 요약하는 것은 어색하다. 동맹이 서로에게 관세를 부과하는 일 자체가 이미 평화의 언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전쟁은 진정 시작된 지 오래였다. 다만 그동안은 화약이 훈기가 아니라 협상이라는 외피 속에 감춰져 있었을 뿐이다. 마크 카니는 오늘의 사태를 예감하고 있었다. 지난 1월 다보스 포럼에서 그는 "이것은 전이(轉移)가 아니라 파열(rupture)"이라고 선언하며, 중견국들이 경제적 강압에 굴복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경고가 이제 현실이 되었다. 협상은 금요일 밤, 막판에 와서 깨졌다. 양측은 서로가 마지막 순간 조건을 바꿨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카니가 문제 삼은 것은 관세율 자체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었다. 미국 측이 제안한 막판 조건에는 캐나다산 차량에 대한 관세 완화 축소, 그리고 무엇보다 캐나다가 다른 나라와 무역협정을 체결하는 것을 제한하는 조항 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브리티시컬럼비아 주 총리 데이비드 에비는 그 조건을 받아들이는 것은 캐나다를 "제 51번째 주의 경제적 동격자"로 격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카니는 이를 "주권의 문제"라고 규정했다. 여기서 이 사건이 단순한 무역 분쟁이 아니라 어떤 절을 촉발하는 사건임이 드러난다. 트럼프는 반복적으...

[지오의 생각] 정의는 느리게, 그러나 조금씩 — 아사드 장교의 첫 송환

베이루트의 시리아 대사관 앞, 서류 한 장을 마치고 나온 67세의 노장군이 체포된 건 지난 8월 8일이었다. 아델 이사 소장. 그는 2016년까지 시리아 동부 데이르에조르 지역의 지상군을 지휘했던 인물로, 살인과 고문으로 인한 사망, 그리고 내전과 종파 분쟁을 선동하기 위한 침략 범죄 혐의를 받고 있다. 체포 당시 그는 혐의를 부인했다고 사법 당국자들은 전한다. 그리고 수요일, 레바논 정부는 그를 시리아로 인도했다. 2024년 12월 아사드 정권이 무너진 이후, 전 정권 인사가 송환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한 건의 송환은 단순한 범죄인 인도 이상의 무게를 지닌다. 1951년 체결된 양국 사법 협정이라는 오래된 조약이 이번에 처음으로 실질적인 효력을 발휘했고, 시리아의 새 정부는 지난 1월 레바논에 기소를 원하는 전 고위 장교 200명 이상의 명단을 전달한 바 있다. 이사 소장은 그 목록의 첫 번째 실체가 된 셈이다. 다마스쿠스의 수사 판사 앞에 서게 될 그의 재판은, 형사 법원 회부 여부를 가리는 절차에서 시작된다. 이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은 두 갈래로 갈린다. 한쪽은 이번 송환을 '정의의 시작'으로 읽는다. 14년간의 내전에서 최소 50만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동안 가해자들은 대부분 처벌을 피해왔다. 이달 초 다마스쿠스 법원이 아사드 전 대통령과 동생 마헤르에게 궐석 사형을 선고한 것도, 이번 장교 송환도, 그 오랜 공백을 메우려는 몸부림으로 보인다. 다른 한쪽은 냉정하다. 아사드 형제는 여전히 모스크바에 있고, 궐석 재판은 상징적 의미를 넘어서기 어렵다. 사형 선고를 받은 사촌 와심 알 아사드와 아테프 나집은 시리아에 잡혀 있지만, 정작 최고 책임자들은 손에 닿지 않는 곳에 있다. 나는 이 두 시선 모두가 부분적으로 옳다고 본다. 궐석 재판과 상징적 판결만으로는 정의가 완성되지 않는다는 냉소는 타당하다. 그러나 이사 소장의 송환은 그 냉소를 넘어서는 실질적인 진전이다. 그는 실제로 체포되었고, 실제로 시리아 ...

2026-03-14 세계 뉴스 (오후)

1. 미국, 이란 카르그 섬 군사 기지 공습... 트럼프 "석유 시설은 보존" 미국이 이란의 주요 석유 수출 허브인 카르그 섬의 군사 목표물을 공습했다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발표했습니다. 카르그 섬은 이란 석유 수출의 90%를 담당하는 핵심 기지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소셜미디어에서 "미군이 카르그 섬의 모든 군사 목표물을 완전히 파괴했다"며 석유 기반시설은 온전히 남겨두었다고 밝혔습니다. 그는 "그러나 이란이나 다른 누구라도 오르무즈 해협에서 선박의 자유로운 통행을 방해한다면 즉시 이 결정을 재고하겠다"고 경고했습니다. 원문 보기 (Reuters, 2026-03-13) 2. 미국, UN 여성권리 결의안 단독 반대 투표... 37대 1 압도적 통과에 환호 유엔 여성지위위원회(CSW)에서 미국이 여성 권리 관련 결의안에 대해 유일하게 반대 투표를 했습니다. 37개국이 찬성하고 6개국이 기권한 가운데, 미국만이 반대를 던졌습니다. 이번 결의안은 여성과 소녀의 법적 접근성 강화를 다룬 것이었으며, 1996년 이래 합의에 의해 채택되던 관행을 깨고 투표로 진행되었습니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 결의안에서 "성 이데올로기를 촉진하는 모호한 언어"와 "성적 및 재생산 건강"이 낙태 권리를 암시한다는 이유로 반대했습니다. 투표 결과가 발표되자 유엔 총회장에서는 기립 박수와 환호가 터져 나왔습니다. 여성단체들은 "다자주의가 죽지 않았다. 유엔 시스템이 여전히 세계 무대에서 성평등을 위해 싸우고 있다"고 환영했습니다. 원문 보기 (IBTimes UK, 2026-03-12) 3. 이스라엘, 레바논 대규모 지상 침공 계획 중... 관리들 확인 이스라엘이 레바논에 대한 대규모 지상 침공을 계획하고 있다고 관리들이 밝혔습니다. 이는 이란-이스라엘 분쟁이 확대되는 가운데 발표된 것으로, 지역 긴장이 고조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이스라엘 관리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