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오의 생각] 법정은 '미쳤는가'를 물었고, 가족은 '왜 우리 아들인가'를 물었다
2023년 11월 25일 저녁, 미국 북동부 버몬트주 벌링턴의 조용한 주택가. 세 청년이 담배를 피우며 걸었다. 영어와 아랍어를 섞어 이야기했다. 그중 둘은 팔레스타인 전통 목도리인 케피예(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그리움을 담아 두르는 천)를 둘렀다.
세 사람은 서안지구 라말라에서 같은 학교를 다닌 친구였다. 각자 미국의 대학에 다니고 있었고, 추수감사절을 맞아 한 친구의 할머니 댁에 모였다. 그날도 볼링장에서 사촌의 생일을 챙기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모두 스무 살이었다.
그때 한 남자가 현관에서 내려왔다. 표정이 없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 사람 앞 1.5~3미터까지 다가와 권총을 꺼내 쐈다. 목격자는 총성이 네 발에서 여섯 발쯤 들렸다고 했다.
히샴 아와르타니는 가슴을 맞았다. 총알이 어깨뼈에 튕겨 척추를 다쳤다. 그는 허리 아래가 마비됐다. 타흐신 알리 아흐마드는 쇄골을, 킨난 압달하미드는 엉덩이를 맞았다. 셋 다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날 이후 3년 가까이 이 사건은 법정에 묶여 있었다.
지난 9월 21일, 배심원단은 세 청년을 쏜 제이슨 이튼(51)에게 살인미수 혐의 3건 모두 유죄를 평결했다. 그는 최고 종신형을 받을 수 있다. 형량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이 재판에서 다퉈진 것은 "누가 쐈는가"가 아니었다. 이튼은 자기가 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다. 다퉈진 것은 "그가 제정신이었는가"였다.
변호인단은 심신상실(정신이 온전하지 않아 행동의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근거는 이러했다. 그는 사건 두 주 전 신용협동조합에서 해고됐다. 그 뒤 지역 라디오 방송을 들으며 CIA와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가 자기에게 명령을 보낸다고 믿었다. 하나님이 길 건너 유대인 가족을 지키라고 시켰다고도 믿었다. 변호인 측 정신과 전문의 파비안 살레는 그가 망상과 환각에 시달렸다고 진단했다.
검찰은 정면으로 반박했다. 검찰 측 전문의 질람 비스와스는 그에게 정신병이 없었다고 봤다. 대신 자기애적 성격 장애와 주의력결핍장애, 그리고 매일 이어온 대마와 술이 겹쳤다고 봤다. 가장 결정적인 대목은 이것이었다. 이튼은 스스로 "내가 환각을 본 걸 수도 있다"고 의심했다. 비스와스는 그 의심 자체를 근거로 삼았다. 진짜 망상은 자기가 망상인지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재판은 일주일 걸렸다. 증인은 피해자 세 명과 양쪽 정신과 전문의들이었다. 배심원단이 평결을 내리는 데 걸린 시간은 두 시간이었다.
두 시간. 이 숫자가 이번 재판에 대해 가장 많은 것을 말해준다. 일주일 동안 정신의학이 동원됐지만, 배심원들에게 그 논쟁은 승부가 갈리는 문제가 아니었다. 남자가 총을 들고 걸어 나와 세 사람을 쐈다. 그 장면은 초 단위로 명확했다. 어려운 질문은 다른 곳에 있었다.
나는 이 사건이 증오범죄라고 본다. 다만 법이 증명할 수 있는 방식의 증오범죄는 아니었다. 이 둘은 다르다.
법정은 한 가지만 물었다. "그가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을 만큼 정신이 망가졌는가." 유족들은 다른 것을 물었다. "왜 우리 아들들이었는가." 유죄 평결은 첫 번째 질문에만 답한다. 두 번째 질문은 판결문 어디에도 없다.
그 답은 재판 기록 안에 이미 들어 있었다. 이튼은 체포 직후 변호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할머니가 미리 '내 손주들이 동네에 올 건데, 테러리스트처럼 차려입고 올 거야'라고 말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이 문장은 법정에서 그의 정신 상태를 보여주는 증거로 쓰였다. 유족들은 같은 문장을 다르게 읽었다. "누구를, 왜 쐈는지 헷갈리는 사람의 말이 아니다. 친구들과 명절을 즐기던 청년들을 보고, 자기 편견 때문에 죽이기로 결심한 사람의 말이다."
같은 문장, 두 개의 해석. 법은 그중 하나만 담을 칸을 가지고 있다. 그 칸은 "정신이상"이다. 편견은 들어갈 자리가 없다.
증오범죄 혐의는 끝내 붙지 않았다. 법이 요구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증오범죄는 "피해자의 정체성 때문에 범행했다"는 점을 증명해야 성립한다. 그런데 이튼은 쏘기 전에도, 쏘는 동안에도, 쏜 뒤에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여기에 사실 하나가 겹쳤다. 사건 전에 그가 팔레스타인 편에 서는 듯한 글을 소셜미디어에 올린 기록이 있었다. 검찰은 그 기록 때문에 "반팔레스타인 증오"를 세우기가 더 어려워졌다.
여기가 일반인이 놓치는 지점이다. 법은 "깨끗한 편견"을 요구한다. 인생에 모순이 없고, 한 방향으로만 미워하는 사람. 그러나 실제 사람은 그렇게 생기지 않았다. 팔레스타인에 동조하는 글을 쓰던 사람이, 일자리를 잃고 술과 대마에 기대고, 라디오에서 적을 찾던 끝에 아랍어를 쓰는 청년들을 쏠 수도 있다. 정신병과 편견은 서로 배타적이지 않다. 한 사람 안에 같이 있을 수 있다. 법은 그 둘을 동시에 담지 못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실이 남는다. 망상의 내용은 혼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라디오로 CIA의 명령을 듣는 것은 병이다. 그러나 그 명령의 내용, 즉 아랍어를 쓰고 케피예를 두른 청년들이 위험하고 유대인 이웃을 그들로부터 지켜야 한다는 이야기는 그가 살던 시대가 이미 만들어 놓은 재료다. 정신병은 그가 방아쇠를 당길 만큼 흔들려 있었다는 것을 설명한다. 그러나 총구가 향한 곳은 그를 둘러싼 이야기들이 미리 정해 놓았다.
물론 변호인 측 주장을 조롱해서는 안 된다. 심신상실은 무고한 사람을 감옥에 넣지 않기 위해 오래 다듬어진 보호 장치다. 정신이 온전치 않은 사람에게 형벌을 물을 수 없다는 원칙은 문명의 성취다. 배심원단은 그 원칙을 진지하게 심리한 뒤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건 제도가 잘못 작동한 사례가 아니다.
보수 쪽에서는 증오범죄 혐의를 정치적 구호를 위해 남용하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증명 기준이 높아야 한다는 그 지적은 옳다. 나도 동의한다. 문제는 다른 데 있다. 그 높은 기준이 이 사건에서 "왜"라는 질문을 통째로 재판 밖으로 밀어냈다는 점이다. 법이 증명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 아닌 게 아니다. 법정의 언어와 진실의 언어는 다르다. 유족들이 "우리는 배심원의 판단이 필요 없다"고 말한 이유가 여기 있다. 그들은 그 이유를 이튼의 입에서 직접 들었다.
재판 첫날 법정에서는 작은 일도 있었다. 판사는 방청객들에게 케피예를 벗으라고 했다. 그 옷이 배심원의 판단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이유였다. 피해자 세 명에게만 증언하는 동안 두르는 것이 허용됐다.
생각해 보면 이상한 장면이다. 공정한 재판을 위해 방 안에서 천 조각 하나를 치워야 했다. 피해자들의 정체성은 배심원을 흔들 수 있는 위험 요소로 취급됐다. 그런데 그 정체성이 이 사건의 이유였는지는 배심원에게 한 번도 물어지지 않았다.
나도 매일 뉴스를 정리해 목록으로 만든다. 오늘 아침 내가 올린 목록에도 이 소식은 들어 있었다. 그런데 같은 기간 가자에서 죽은 사람들의 이름은 그 목록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아와르타니는 직접 그 점을 지적한 적이 있다. "팔레스타인 사람이 아니라 사람으로 보였다"는 것, 그리고 같은 밤 서안지구에서 같은 일이 벌어졌다면 자기 이름은 어느 게시판에나 잠깐 붙었다가 지워졌을 거라는 것. 실제로 그는 2023년 11월, 가자에서 죽은 사람들의 이름을 적는 작업에 참여했다가 명단에서 '히샴'이라는 이름을 30개 찾았다고 썼다.
그렇다면 이 판결이 바꾼 것은 무엇인가. 이튼은 감옥에 간다. 그것으로 끝이다. 그러나 이 사건이 보여주는 위험은 다른 곳에 있다. 일자리를 잃고, 술과 대마에 기대고, 혼자 지내던 남자가 7개월 전에 권총을 샀다. 집에는 산탄총 세 자루가 더 있었다. 그에게는 치료가 없었다. 대신 라디오가 있었다.
이런 사건은 앞으로 더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정치적 폭력이 조직의 명령이 아니라 개인의 절망에서 나오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법정은 같은 방식으로 움직일 것이다. 행동은 처벌하고, 이유는 말하지 않는다. 그 간격이 벌어질수록 사람들은 판결을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지금 그 세 사람은 스물셋이다. 아와르타니는 휠체어를 타고 대학을 다닌다. 400시간 넘게 재활을 했고, 손으로 조작하는 차를 몰고 지낸다. 그의 어머니 엘리자베스 프라이스는 평결 뒤 기자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정의가 실현됐습니다. 3년의 슬픔과 상실과 싸움 끝에 우리 가족은 마침내 안도합니다."
그리고 곧바로 이 문장을 덧붙였다. "이 평결은 일어난 일을 되돌리지 못하고, 우리가 아직 안고 있는 상처를 지우지도 못합니다."
두 문장은 서로 모순이 아니다. 둘 다 사실이다. 정의와 위로는 다른 것이다.
그날 밤 세 청년은 담배를 피우고, 볼링장에서 사촌의 생일을 챙기고, 목도리를 두르고 집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 목도리는 고향이 그리워서 두른 천이었다. 법원은 그 밤의 이유를 판결문에 적지 않았다. 그 빈칸은 법이 아니라 우리가 채워야 할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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