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오의 생각] 고맙다는 사람, 바꾸자던 사람
지난주 토요일, 미국 백악관 앞 잔디밭. 트럼프 대통령이 기자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크라이나도 이제 새 대통령을 뽑을 때가 된 것 같다."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온 세상에 문제를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고도 했다. 그만두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그런데 같은 주에 트럼프는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는 "감사하다"고 했다. 러시아가 경유(자동차와 트럭에 넣는 기름)를 미국과 세계 시장에 팔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줬기 때문이다. 한쪽에는 물러나라는 사람, 다른 쪽에는 고맙다는 사람. 이 장면이 조금 이상하게 느껴진다면, 감각이 정상이다.
먼저 확인된 사실부터. 지난 9일 트럼프는 푸틴과 통화한 뒤 이렇게 발표했다. 러시아가 경유 30만 톤을 곧바로 보내고, 11월에 50만 톤, 그 뒤에 100만 톤, 정유시설(기름을 만드는 공장) 상태가 괜찮으면 300만 톤을 더 보내기로 했다는 것이다. 미국 재무부는 바로 그날 임시 허가를 내줬다. 러시아산 경유를 사고, 배로 옮기고, 미국으로 들여오는 것까지 허용한다. 기한은 2027년 4월 7일까지다. 러시아에 대한 제재(잘못한 나라에 경제적 벌을 주는 것)를 이 부분만 잠시 풀어준 셈이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순서를 보면 원인이 보인다. 올해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과 전쟁을 벌이면서 호르무즈 해협(세계 석유제품의 약 5분의 1이 지나가는 좁은 바닷길)이 사실상 막혔다. 기름이 전 세계적으로 귀해졌다. 미국 안에서 경유 가격은 한때 갤런당 6달러를 넘었고, 올해 들어 두 배 가까이 뛰었다. 그리고 11월에는 중간선거(대통령 임기 중에 치르는 국회의원 선거)가 있다. 기름값은 유권자가 매일 주유소에서 눈으로 보는 숫자다.
여기서 트럼프가 만든 이야기가 나온다. "경유 값이 오르는 건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정유시설을 계속 때리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만 때려라." 미국 매체 악시오스는 미 당국자가 우크라이나에 이 요청을 여섯 번 했다고 전했다. 젤렌스키는 "러시아가 우리 발전소 공격을 멈추면 정유시설 공격도 멈추겠다"고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러시아와 거래를 했다는 게 트럼프 쪽 설명이다.
이 설명에는 빠진 조각이 있다. 경유 값이 뛴 첫 번째 이유는 미국이 시작한 이란 전쟁이다. 우크라이나의 공격은 그다음 이유다. 그런데 그 공격은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전쟁 자금줄을 흔들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었다. 자기가 만든 문제의 책임을 약한 동맹에게 넘기는 셈이다. 미국 여론조사를 보면 국민 69%가 "이란 전쟁은 싸울 가치가 없었다"고 답했고, 65%는 물가 책임이 트럼프 정책에 있다고 봤다. 유권자가 지목하는 원인은 우크라이나가 아니다.
숫자도 따져보자. 러시아는 자기 나라에서 쓸 경유가 모자라서 수출을 금지해 둔 상태였다. 우크라이나의 드론 공격으로 정유 능력이 크게 망가졌기 때문이다. 국제에너지기구는 러시아의 경유 생산이 약 30% 줄었다고 본다. 에너지 분석가들은 러시아가 약속한 물량을 실제로 보낼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한다. 트럼프가 자랑한 "엄청난 거래"의 절반은, 러시아가 스스로 막아둔 자기 수출 문을 다시 여는 것에 가깝다. 미국이 받는 것은 몇 달치 기름이고, 러시아가 버는 것은 제재가 풀린 시간과 다시 도는 돈이다.
반대편 이야기도 공정하게 보자. 미국 민주당의 척 슈머 원내대표는 이 거래를 "악마와의 거래"라고 불렀다. 유럽연합의 카야 칼라스 외교 책임자는 "지금은 러시아 압박을 풀 때가 아니다"라고 했다. 반대로 트럼프를 지지하는 쪽은 이렇게 말한다. 선거를 앞둔 정부가 자국민 기름값을 잡는 건 당연하고, 우크라이나가 정유시설을 계속 때리는 것도 현실적으로 위험하다는 것이다. 이 주장에도 일리는 있다. 다만 방법이 문제다.
내가 보는 핵심은 여기다. 사람들은 이 일을 두고 "배신" 또는 "실용"이라고 부르며 갈린다. 그런데 양쪽이 공통으로 깔고 있는 생각이 하나 있다. 제재를 협상 카드로 보는 생각이다. 나는 제재가 카드가 아니라고 본다. 카드는 내려놓았다가 다시 들면 원래대로 돌아오지만 제재는 아니다. 한 번 풀면 다시 걸어도 원래의 무게를 되찾지 못한다. 다음에 다른 나라가 제재를 당할 때 그 나라는 이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미국은 자기 기름값이 오르면 결국 문을 열어준다." 이 학습 효과는 5년, 10년 뒤에 훨씬 큰 청구서로 돌아올 수 있다.
우리에게도 남의 일이 아니다. 최근 한 외신은 한국 항구에서 러시아 쪽으로 경유 17만 톤이 실려 나갔다는 보도를 했고, 정부는 "우리 법을 어긴 것이 확인되면 법에 따라 조치하겠다"고 답했다. 같은 바다 위에서 같은 기름이 오간다. 우리도 이 흐름의 한 부분이다.
백악관 앞에서 트럼프는 동맹의 대통령을 바꾸라고 했다. 하지만 정말 바뀌어야 할 것은, 전쟁과 기름값과 선거가 한 줄로 묶여버린 이 구조인지도 모른다. 그 줄 끝에서 누가 이득을 보는지. 남는 질문은 그것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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