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오의 생각] 벽이 아니라 문이었다 — 그레이엄법을 끈 서명 하나

지난 16일 밤, 백악관에서 서명 하나가 이뤄졌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러시아 제재(잘못한 나라에 벌을 주는 조치)를 상당 부분 면제하는 행정명령(대통령이 혼자 내리는 명령)에 사인했다.

시점이 절묘하다. 이 제재는 이틀 뒤인 18일부터 시행될 예정이었다. 마지막 이틀을 남기고 스스로 브레이크를 밟았다.

이 사건의 핵심은 트럼프가 푸틴에게 굴복했다는 게 아니다. 미국이 러시아를 겨눠 만든 제재가 애초에 벽이 아니라 문이었다는 사실이다.

그 문의 손잡이는 안쪽에 달려 있었다. 법은 미국 상원에서 찬성 86표, 반대 11표로 통과했는데, 대통령에게 '면제할 권한'까지 함께 쥐여줬다.

트럼프는 지난달 그 법에 직접 서명했고, 한 달 만에 그 법을 껐다. 놀란 사람은 거의 없었다. 세게 매기라고 만들면서 안 매길 권리도 같이 준 법이었으니까.

꺼진 범위는 작지 않다. 러시아산 기름을 사는 중국·인도·튀르키예에 최고 100% 관세(다른 나라 물건에 붙는 세금)를 매기는 조항이 대표적이다. 중국·인도를 겨눌 압박 카드까지 스스로 내려놨다.

푸틴 대통령과 러시아 은행, 제재를 피해 몰래 기름을 나르는 '그림자 선단'을 겨눈 조치도 함께 멈췄다.

비판은 야당에서만 나오지 않았다. 공화당의 톰 틸리스 의원은 "무책임을 넘어선 처사"라고 했고, 존 코닌 의원은 "린지는 경악할 것"이라고 적었다.

이 법의 이름은 지난 7월 갑자기 세상을 떠난 린지 그레이엄 상원의원의 이름을 딴 '그레이엄법'이다. 트럼프의 오랜 친구이자 대러 강경파였던 사람이다. 이름을 빌려준 사람은 이미 없어서, 자기 이름의 법을 지킬 수가 없다.

그럼 왜 껐나. 이유는 우크라이나가 아니라 경유(트럭과 배가 쓰는 기름)다.

미국 경유값은 지난달 말 갤런당 6.53달러로 사상 최고를 찍었다. 1년 전보다 70% 가까이 올랐고, 트럭과 농기계와 배가 모두 이 기름으로 움직인다.

원인은 러시아가 아니다. 지난 2월 시작된 미국·이스라엘과 이란의 전쟁으로 호르무즈 해협(중동 기름이 지나는 좁은 바닷길)이 막혔고, 중동의 경유 수출은 평소의 4분의 1로 줄었다.

세계 경유 수출은 하루 100만 배럴 줄었다. 그런데 트럼프는 이 화살을 우크라이나로 돌렸다. 러시아 정유시설(원유를 휘발유·경유로 바꾸는 공장)을 때리지 말라고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요구했다.

이 대목이 이상하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를 가장 아프게 때리는 무기가, 미국 유권자의 주유소 가격을 올린다. 동맹의 이해가 정면으로 부딪혔다.

우크라이나는 공격을 잠깐 멈췄다가 다시 시작했다. 그러자 이틀 뒤 제재가 꺼졌다. 압박은 적국보다 동맹에게 먼저 작동한 셈이다.

돌아온 대가는 숫자로 보면 초라하다. 러시아가 즉시 공급하기로 한 경유는 30만t, 약 225만 배럴이다. 세계 부족분 하루 100만 배럴에 견주면 이틀치 남짓이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올 물량까지 다 합쳐도 호르무즈가 열리지 않으면 부족을 메우기 어렵다고 본다.

그래서 이 결정은 기름을 구한 게 아니라 시간을 산 것이다. 보름 뒤 중간선거(2년마다 국회의원을 새로 뽑는 선거)를 앞둔 표 계산이 먼저 움직였다.

내가 보는 진짜 뉴스는 여기다. 제재가 서명 하나로 꺼진다는 걸 배운 나라는 러시아만이 아니다. 중국과 인도는 이 법이 애초에 관세 도구로도 쓰일 수 있음을 확인했고, 유럽은 미국의 약속을 다시 계산한다.

러시아 대통령 특사는 이번 결정을 "역사적 순간"이라고 환영했다. 벌을 기다리기만 하면 상대가 값을 깎아주리라는 걸 세상이 배웠다.

우리는 이 장면을 유가 뉴스로 흘려보내기 쉽다. 하지만 16일 밤 서명된 종이에 적힌 이유는 "국익에 부합한다"는 한 줄뿐이었다.

벌은 세게 설계됐지만 잠금장치는 안쪽에 달려 있었다. 그 잠금장치를 남긴 건 트럼프가 아니라, 그 법을 만든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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