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오의 생각] 750명이 지나간 다섯 날
지난 11월 1일 밤 10시 59분, 우크라이나 남부 헤르손주(우크라이나 남부의 행정구역)의 작은 도시 올레시키에서 닷새 동안 멈췄던 휴전이 예정대로 끝났습니다. 올레시키는 2022년 2월 러시아가 침공한 직후 점령된 곳입니다. 강 건너편이 우크라이나가 지키는 헤르손 시인데 다리가 끊겨서, 주민들은 몇 달째 식량과 약을 제대로 받지 못했습니다.
BBC는 이 소식을 한 줄로 전했습니다. “희귀한 인도적 휴전이 끝났다.” 그리고 곧바로 러시아가 전력망을 때려 수십만 가구가 정전됐다는 보도로 넘어갑니다. 이 휴전을 누가 만들었는지는 기사에 나오지 않습니다.
조사해 보니 중재자는 외교관이 아니라 미국의 영부인(대통령의 배우자) 멜라니아 트럼프였습니다. 백악관은 지난달 23일 합의를 알리면서 그를 ‘단독 중재자’라고 적었고,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외교 전문가들보다 훨씬 낫다”고 칭찬했습니다. 한국 매체들은 중재자를 제목에 올렸지만 BBC는 이 대목을 통째로 뺐습니다.
내가 이 사건에서 보는 건 따로 있습니다. 닷새 열린 이 창구는 인도주의가 이겨서 열린 게 아니라, 세 나라의 이해가 맞아떨어져서 열렸습니다. 그래서 나갈 수 있는 사람 수만큼만 열렸고, 예정된 분에 정확히 닫혔습니다.
숫자가 그것을 말해 줍니다. 휴전 기간에 750명이 도시를 빠져나갔습니다. 전쟁 전 2만 4,000명이 살던 도시에 남아 있던 사람이 1,700~2,000명이었으니, 절반 남짓입니다. 남은 쪽은 고령자와 아이들, 노부모를 두고 떠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나오는 길도 이 거래의 성격을 드러냅니다. 우크라이나 쪽으로 가려는 주민들은 러시아가 점령한 크림반도로 가서 러시아 본토를 거친 뒤, 비행기로 벨라루스까지 날아가서야 차로 우크라이나에 닿았습니다.
자기 도시를 떠나 자기 나라로 가는 길이 침략국의 영토를 관통한 겁니다. 강의 다리가 끊겨 다른 길이 없었다는 사정은 있지만, 이 경로는 러시아가 이 도시를 자기 땅처럼 다뤄도 된다는 사실을 매일 확인시켜 줍니다.
시작된 시점도 우연이 아닙니다. 미국은 곧 중간선거(대통령 임기 중간에 치르는 선거)를 치릅니다. 경향신문은 이 휴전을 지지율에 몰린 미국 행정부의 ‘막판 뒤집기용 외교 카드’로 봤습니다.
반대로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멜라니아 여사에게 감사를 표한 것도 사실입니다. 명분은 인도적이고 효과는 정치적이며, 둘은 서로를 취소하지 않습니다.
경고도 함께 적어 둡니다. 미국의 전쟁연구소는 러시아가 휴전 기간에 병력을 정비할 수 있다고 봤고, 우크라이나 군 당국도 휴전이 끝난 뒤 헤르손 방면에서 공세를 준비할 수 있다고 봤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닷새 동안 총구는 정리되고 있었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다만 이건 확인된 사실이 아니라 우크라이나 쪽의 판단입니다.
그래서 내 판단은 이렇습니다. 인도적 휴전은 사람이 아파서 열리는 게 아니라 이해가 겹칠 때 열립니다. 겹침이 풀린 11월 1일 밤 10시 59분에 문이 닫힌 것도 그래서 정확했습니다.
남아 있는 1,000명에게는 그 겹침이 없었고, 겨울은 그대로 옵니다. 이 전쟁이 앞으로 ‘끝나는 전쟁’이 아니라 ‘구역별로 잠깐씩 관리되는 전쟁’이 된다면, 기억해야 할 숫자는 휴전이 며칠 갔는지가 아니라 그 사이에 누가 나왔고 누가 남았는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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