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오의 생각] 이미 한 번 갚았습니다, 엉뚱한 사람에게
11월 3일 오전, 카리브해의 작은 섬나라 안티구아. 영국을 포함해 56개국이 모인 커먼웰스(옛 영국 식민지들이 주축인 국가 협의체) 정상회의 개막식에 찰스 3세 영국 국왕이 섰습니다. 그는 노예 무역을 두고 “내 마음을 공포로, 내 영혼을 가장 깊은 개인적 슬픔으로 채우는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번 회의의 핵심 의제는 노예제 배상입니다. 카리브해 국가들은 영국이 노예 무역으로 쌓은 부에 대해 공식 사과와 보상을 요구해 왔습니다. 그런데 국왕은 사과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조상들이 한 일을 바꿀 수 없다. 다만 과거에서 배울 수 있다”는 문장으로 그 부분을 닫았습니다.
이 문장은 장부 앞에서 틀렸습니다. 영국은 이미 노예제 배상을 한 번 치렀습니다. 받은 쪽이 노예가 아니라 노예 소유주였다는 점만 다릅니다.
1833년 영국 의회는 노예제를 폐지하면서 노예 소유주에게 보상금을 주기로 했습니다. 사람을 잃은 쪽이 아니라 사람을 소유했던 쪽을 달랜 돈이었습니다. 정부는 그 돈을 세금이 아니라 국채로 빌렸고, 재무부가 정보공개 요청에 답한 자료를 보면 이 빚은 2015년 2월 1일에 완전히 갚아졌습니다.
다시 말해 ‘과거’는 11년 전까지 영국 세금으로 매달 갚아 온 청구서였습니다. 노예로 끌려간 이들의 후손도 그 세금을 함께 냈습니다. 끝난 일이 아니라, 얼마 전까지 상환 중이던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영국이 내미는 것이 돈이 아니라는 점이 눈에 들어옵니다. 앤디 번햄 영국 총리는 사과에 열려 있다고 말하면서도 “오늘의 영국인이 다른 시대에 일어난 과거의 잘못에 재정적 책임을 질 수는 없다”고 선을 그었습니다. 대신 내놓은 것이 ‘구조적 대화’와 ‘채무 재조정’입니다.
구조적 대화는 사과를 하겠다는 약속이 아닙니다. 사과의 형식을 당사국들과 함께 정하겠다는, 문장을 만드는 회의를 열겠다는 약속입니다. 형식을 피해자가 만들면 사과는 그들의 것이 되고, 영국은 완성된 문장을 읽기만 하면 됩니다.
채무 재조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빚의 액수를 깎는 일이 아니라 갚는 기간을 늘리고 이자를 낮추는 일이고, 빌려준 쪽은 민간 채권단과 다른 나라 정부, 국제기구입니다. 총리는 이 작업에 G7 밖 기부자와 민간 부문이 함께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영국은 돈을 내는 쪽이 아니라 사람을 모으는 쪽에 섰고, 총리실은 기존 예산 위에 추가 원조를 얹지 않겠다고 밝혔습니다.
반대 논리도 만만치 않습니다. 200년 전 일의 값을 오늘의 납세자에게 물을 수 있느냐는 문제입니다. 2023년 미국 경제분석 회사 브래틀 그룹이 계산한 영국의 몫은 24조 달러였습니다. 그런 숫자는 협상을 끝내는 값이 아니라 시작하는 값이므로, 계산 자체를 거부하는 쪽이 오히려 합리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쟁점은 “사과하느냐”가 아니라 “무엇으로 갚느냐”입니다. 영국은 지불 수단을 현금에서 절차와 시간으로 바꿨습니다. 절차는 예산에 잡히지 않고, 시간은 장부에 잡히지 않습니다.
국왕이 대안으로 든 것도 교육 기회와 일자리 투자, 회원국 간 무역 확대, 기후 대응이었습니다. 모두 나쁘지 않은 일입니다. 다만 영국 재무부에서 나가는 돈은 거의 없고, 무역이 늘면 영국 기업도 함께 이득을 봅니다.
1833년의 그 법은 ‘폐지’라는 이름으로 소유주의 재산을 지켜 줬습니다. 이번에도 영국은 노예제의 값을 계산하는 대신, 계산하지 않는 절차를 정교하게 만들었습니다. 값을 치를 사람을 정하지 않은 사과는 사과가 아니라 일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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