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오의 생각] 남의 손에 있던 스위치 — 한쪽만 지킨 휴전

지난 15일, 모스크바 남동쪽 랴잔의 정유공장(원유를 휘발유와 경유로 바꾸는 시설)에 불이 붙었다. 러시아 주지사는 격추된 드론 조각 때문이라고 했고, 우크라이나는 자기가 때렸다고 인정했다.

이 휴전은 한쪽만 지킨 휴전이었다. 한쪽만 묶는 규칙은 휴전이 아니라 요구다.

우크라이나는 사흘 동안 공격을 멈췄다. 협상 의지를 보이려는 것이었다. 그 사이 러시아는 발전소와 가스 충전소를 계속 때렸다. 키이우에서는 전기와 물이 끊겼고, 이줌에서는 33명이 다쳤다.

그래서 젤렌스키 대통령은 다시 때리기로 했다. 그는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정유시설 공격을 막던 제한은 풀렸다. 이제 끝이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짚을 게 있다. 이 제한을 건 쪽은 러시아가 아니라 미국이다. 지난 11일 트럼프 대통령은 양국이 에너지 휴전에 합의했다고 발표했지만, 두 나라는 그런 합의를 했다고 밝힌 적이 없다.

그런데 미국이 이 휴전을 원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11월 중간선거(임기 중간에 치르는 미국 의회 선거)를 앞두고 기름값이 급하기 때문이다. 이란 전쟁으로 호르무즈 해협(중동 기름이 지나가는 좁은 길)이 막혔고, 트럼프 대통령은 경유 값이 오르는 책임을 우크라이나에게 돌렸다.

그래서 압박의 방식도 달라졌다. 우크라이나가 쓰는 무기와 정보가 미국 손에 있으니, 그것을 잠그는 쪽으로 압박이 들어왔다.

미사일이 오는 것을 미리 알려주던 조기경보 정보가 끊겼다는 게 젤렌스키 대통령의 주장이다. CNN은 우크라이나가 가진 패트리엇(날아오는 미사일을 맞히는 방공 미사일) 요격탄이 바닥났다고 전했다.

지난 13일 밤부터 스타링크(위성 인터넷 서비스)의 군사용 버전인 스타실드가 잠겼다. 드론이 시속 160킬로미터를 넘으면 연결이 끊긴다.

이건 기술 문제가 아니다. 시속 160킬로미터 제한은 그대로 무기 잠금장치다. 우크라이나군은 영상 전송이 막혀 표적을 찾지 못했고, 속도를 줄이다 러시아 방공망에 격추되기도 했다.

스위치를 쥔 사람은 머스크가 아니다. 그는 "스타실드는 미군이 통제하고, 속도 제한은 미군과 대통령이 결정한다"고 말했다. 자기 회사 서비스인데 결정권은 정부에 있다는 뜻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전쟁의 성질이 바뀌었다고 본다. 전장의 우열이 민간 기업의 요금제와 다른 나라의 선거 일정에 달려 있게 됐다.

양쪽 진영의 주장에는 공통된 전제가 하나 있다. 우크라이나는 계속 미국이 쥔 열쇠로 싸운다는 것이다. 러시아 편 논리도, 우크라이나를 응원하는 논리도 이 전제는 건드리지 않는다.

유럽이 움직인 이유가 여기 있다. 16일 브뤼셀에서 유럽 지도자들은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트럼프 비판을 줄여달라고 하면서도 지원은 늘리겠다고 했다. 영국은 스톰섀도 미사일을 더 주기로 했고, 미국이 제안한 러시아 동결 자산(묶어둔 러시아 돈) 해제는 거절했다.

다만 유럽도 미국의 정보와 무기를 당장 대신할 수는 없다. 우크라이나의 하늘은 여전히 비어 있다.

전쟁은 흑해로 번지고 있다. 루마니아 연안에서 화학제품 운반선이 드론에 맞아 선원 7명이 실종됐고, 불가리아 앞바다에서도 화물선이 침몰해 11명이 실종됐다. 루마니아 대통령은 드론 공격이라고 했지만 불가리아 대통령은 증거가 없다고 했다. 나토도 흑해 문제로 회의를 열기로 했다.

누가 쐈는지 다들 아는 것 같으면서도 아무도 단정하지 못한다. 책임을 흐리는 것 자체가 하나의 무기다. 책임을 정하지 못하면 되받아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랴잔의 불은 꺼질 것이다. 하지만 우크라이나가 자기 손으로 만든 압박 수단은 러시아 정유공장을 때리는 일이다. 그걸 빼앗으려는 나라가 우크라이나가 쓰는 무기와 통신을 쥐고 있다. 유럽이 그 열쇠를 대신 쥘 수 있는지가 앞으로 몇 달의 승부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한컴 한글 문서 작성 시 곧은 따옴표 고정하기

윈도우 부팅시 크롬을 전체 화면으로 자동 실행하는 방법